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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테오 & 율

#01. 의뢰

 

 

붉은 융단을 소리 없이 밟으며 들어서자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둥근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그 주위로 술기운에 다소 소란스러워진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베안 루아. 이멘마하의 골목 한편에 자리 잡은 이 주점은 이웨카가 뜬 밤이 되어야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늦은 밤 테오가 이 곳을 찾은 것은 단지 술을 마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붉은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마찬가지로 붉은 머리칼을 하고 고고하게 서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테오, 어째서 이제야 찾아주신 거예요. 당신을 만나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테오는 살짝 웃으며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못본새에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루아. 당신이 있는 한 저 하늘의 이웨카도 빛을 잃고 말겠어요."

"짓궂긴. 뭐, 입에 발린 말이라도 듣기엔 좋네요."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다 가게 내부를 둘러보는 테오의 눈에 한 사내가 들어왔다. 굳은 표정을 하고 이 쪽을 주시하고 있는 그는 그동안 거래를 위해 몇 번 베안 루아를 방문했을 때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큰 키와 다부진 몸, 시선을 조금 더 내리자 자잘한 자상이 나있는 손이 보였다. 마치 제 것과 같은. 처음에는 손님인가 싶었으나 그가 서있는 곳은 침실이 있는 2층과 연결된 계단이었으므로 이내 그 생각은 지워버렸다. 필시 이 곳 베안 루아와 관계된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곧 시선을 거두고 계단을 내려와 테오를 지나쳐 가게 밖으로 사라졌다. 어쩐지, 다시 만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

 

달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벨테인의 밤이었다. 테오는 약속된 상환 기일이 넘은 고객을 만나기 위하여 타라에 도착한 참이었다. 알아보는 이가 있으면 곤란하기에 본래 수금을 하러 직접 나서는 일은 드물었으나 마침 근처를 지나던 길이라 들러본 것이었다. 사정이 있으니 꼭 좀 부탁드린다며 급하게 많은 골드를 빌려갔던 그 남자. 최근 사업을 크게 벌였던 것으로 아는데…. 그러니까 이 쪽이었던가.

 

탕-

 

골목으로 막 들어선 테오의 등 뒤로 어둠의 장막을 찢고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빠르게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쓰러지는 그림자. 그리고 곧 수습을 하려는 듯 다가온 한 남자. 기척을 숨긴 채 가까이 다가간 테오는 차디찬 바닥에 누워있는 그림자가 제가 방금 전까지 만나려고 했던 고객임을 알아차렸다.

 

"그 자를 죽이면 저는 누구에게 돈을 받아야 하죠?"

 

시신의 몸을 뒤지고 있던 남자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고 굳은 표정의 테오와 마주하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은 남자는, 그였다. 얼마 전 베안 루아에서 마주쳤던 날카로운 눈빛의 그 남자. 길에 쓰러져있던 그를 루아가 발견한 뒤로 회복하는 동안 잠시 가게 일을 도와주며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다. 스쳐 지나가던 그에게서 옅은 화약 냄새를 맡았던 그 날의 기억. 자상으로 가득한 손의 안쪽이 얼핏 보아도 굳은살뿐이라 필시 총을 잡는 사람이겠구나 싶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는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며 쪽지 한 장을 던지듯 내밀었다. 테오에게도 익숙한 그것은 한눈에 봐도 청부살인을 의뢰하는 의뢰서. 어떠한 이유로 주점에 머무르며 이런 일까지 행하고 있는 것인지 테오는 이 남자가 조금, 궁금해졌다. 그는 곧 볼 일이 끝났다는 듯 장총을 품 속에 넣은 채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났고, 테오는 당연하게 그 뒤를 따랐다.

 

"뭔데 따라오지? 너도 죽고 싶어?"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마주 보는 눈빛이 야생의 그것 같았다.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한 채 계속 떠돌아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에린에 정착하기 이 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테오는 낮게 웃으면서 품 속에서 종이를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시선을 내려 제가 내민 종이를 훑어보았다. 다난의 언어로 쓰인 그것은,

 

"따로 보지. 여긴 보는 눈이 많다. 다난."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청부살인 의뢰서.

 

"곧 전령을 보내도록 하죠.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그는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면을 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이한 밤이었다.

 

 

 

 

 

 ̄ ̄ ̄

 

어쩐지 자신과 닮아 있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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